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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보

    생애

    동학 입도

    손병희는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청주)에서 출생하였다.

    1882년 10월 5일 손병희는 평등사상을 내세운 동학에 입도하였다.

    2년이 지난 1884년 10월 5일 해월 최시형을 만났고, 평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손병희는 최시형으로부터 동학 제3대 교주로 임명받아

    동학농민혁명에서 전봉준과 함께 혁명 전선에 참여하였고,

    훗날 천도교 최고 지도자로, 3‧1운동 민족대표로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동학·천도교의 제3대 교주로, 자(字)는 응구(應九),

    호()는 의암(義菴), 1896년 1월 최시형으로부터

    의암이라는 천도교의 도호(道號)를 받고

    교단 조직 재건작업을 주도하였다.

    일본으로 망명

    일본에 망명중인 선생 등 천도교 간부들의 사진(1904)

    망명 시절은 아직 천도교의 출현 전으로,

    동학 제3교주였던 선생은 박해를 피해 유학생 24명과

    간부 등을 데리고 일본에 망명하였다. 아랫줄 오른쪽이 선생.

    일본 망명 중 ‘근대’라는 것을 직접 체험하고

    단발운동을 지시하는 등 근대 문명 개화운동을 전개했다.

    국내에 진보회를 결성하여 중추기관으로 삼았다.

    하지만 일진회와 합동으로 친일세력으로 오해하여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며 이용구 등 친일 동학교인 100여 명 출교시켰다.

    이때 손병희는 동학의 본질인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깨워,‘

    사람이 곧 한울(하늘)이니 지금의 세상이 이처럼 혼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혼란하기 때문‘ 이라면서 ’먼저 사람의 마음을 고쳐

    세상의 혼란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 망명 중 ‘삼전론’ 제창

    첫째, 도전(道戰)은 국민의 정신을 계발하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이며,

    둘째, 재전(財戰)은 국가의 산업을 개발하여 자립할 수 있는 국력을 키워야 하고,

    셋째, 언전(言戰)은 외국의 사정에 밝아 외국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할 것을 제안한다.

    교육사업 확대

    1907년 12월 21일 보성학원을 천도교에서 인수하여 종교색이 없는 학교로 운영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교단 재정 어려움으로 동국학원을 거쳐 현재 고려대학교로 유지,

    동덕여학교 경영난으로 천도교에서 인수 운영, 현재 동덕여자대학교로 유지

    문화사업을 통한 구국의 길을 모색했던 선생은 보성학원과 동덕여학교를 비롯,

    수십 개의 남녀학교를 운영하여 교육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3.1운동 주도하다

    독립운동의 3대 원칙으로 독립운동을 대중화할 것, 일원화할 것,

    비폭력적으로 할 것 등을 결정하여 3.1운동 준비

    기독교 이승훈, 불교 한용운과 협의하고 최종 참여하기로 결정

    민족대표 33인 결정 (천도교 15, 장로교 7명, 감리교 9명, 불교 2명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

    우이동에 잠들다

    탑골공원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5월까지 전국적으로 만세운동 전개하였다.

    이후 서대문형무소 옥고 중 병세 악화로 1920년 말경 병보석으로 석방

    우이동 봉황각서 치료 중 1922년 5월 19일 환원.

    한 민족사의 거인은 이렇게 마지막 길을 장식했다.

    조선 소요의 장본인 손병희 보도기사

    손병희 유묵 (정영)

    손병희는 그의 행적에 대한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기 우리의 민족운동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영도적 위치에 있었으며,

    방법에 있어서도 때로는 폭력노선, 때로는 개혁노선, 때로는 비폭력노선을 적절히 구사했다.

    손병희는 일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우리 근대사에 나타난 애국 지도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이화-

    생가

    1979년 9월 29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손병희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생가는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초가집으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1962년에는 탄신 100주년을 맞아 충북문화재보존협회가

    그의 생가 근처에 유허비를 건립하고 주위 200㎡에 보호책과 측백나무 울타리를 하여 정리하였다.

     

    손병희는 동학(東學)에 입문하여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10만의 도중(徒衆)을 이끌고 관군(官軍)과 싸웠으며 1897년에는 천도교(天道敎) 3세 교주(敎主)가 되었다.

    1919년 기독교, 불교 대표들과 함께 3·1운동을 영도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옛 서울구치소)에서 복역 중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하다가 병사하였다.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에 그의 동상이 있다.

     

    * 유허지 내 기념관 : 천도교 3세 교주이며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4.8~1922.5.19)를 기려 2000년에 건립하였다.

    충청북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손병희선생유허지 입구에 있다. 천도교총본부가 기증한 선생의 유물 100여 점을 비롯해

    청원지역의 항일운동과 한국의 3·1운동 역사를 알 수 있는 그림·사진·문서·모형·영상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손병희 선생 생가 전경

    활동

    1899년 손병희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글, [각세진경]

     

    동학의 제2대교주 최시형(崔時亨)이 1898년에 극형을 받아 세상을 떠났으므로 동학에서는 제3대 교주가 나와야 했다.

    이러한 시기에 손병희가 ≪각세진경≫을 지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사실상 동학의 제3대 교주라는 것을 뜻한다.

     

    이 글은 그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 동학의 경전으로 쓰여졌는데 이러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교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손병희가 공식적으로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된 것은 1900년인데,

    이에 앞서 이 글을 세상에 미리 내놓은 것은 교주로서의 권위를 미리 서둘러 나타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동학의 교주가 되기까지는 김연국(金演局)과 다소의 대립이 있었다.

    이 ≪각세진경≫은 동학의 제3대 교주를 위한 경쟁 속에서 지어진 글이다.

    글의 내용상으로는 동학의 중요한 몇 가지 교리를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동학에서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셔야 한다[侍天主].”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도 “사람이 하늘을 모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人以侍天者何也].”라는 점을 맨 먼저 문제로 삼는다.

     

    여기서는 이렇게 하느님을 그저 하늘이라고 하고, 하늘을 모신다는 것을

    사람의 본성과 마음이 하늘에서 나왔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사람은 “하느님을 모셔야 한다.”는 동학의 독특한 가르침을

    사람의 “본성과 마음이 하늘에서 나왔다[性心出於天].”고 유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역시 동학의 독특한 가르침인 “밖으로는 신령과 서로 맞닿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는 가르침을 내리는 말씀이 있다[外有接靈之氣內有降話之敎].”는 것을 성리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또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로잡는다[守心正氣].”는 교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동학을 처음으로 세운 최제우의 <논학문 論學文>에 있는,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로잡는다[守其心正其氣].”라는 구절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여기서는 하느님을 위하는 마음을 지켜 자기 기운을 바로잡아 하느님의 기운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이 구절을 ‘수심정기(守心正氣)’라고 유교적으로 표현하여동학의 중요한 교리로 삼은 것은 동학의 제2대 교주 이후의 일이다.

     

    ≪각세진경≫에서는 “수심정기로써 성현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여역시 ‘수심정기’를 유교적인 덕목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동학의 몇 가지 교리를 유교적인 표현으로써 체계적으로 해석한 글이다.

    그러나 동학의 교리는 유교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학의 독특한 교리를 다음과 같이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하늘의 기운이 서로 합해서 하늘과 사람이 말로써 서로 들으며, 뜻이 서로 같아서 만사를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기운이 하느님의 기운과 하나가 되고 사람이 하느님을 통해서

    놀라운 힘과 슬기를 얻을 수 있다는 동학의 가르침을 나타내고 있다.

     

    이 글은 내용으로 보면 유교적인 표현과 이론으로써 동학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밝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의 눈치를 살핀 것이고,

    사실은 간추린 동학의 교리를 은근히 내세웠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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